청소년들의 저항을 제대로 기억하기

2020. 3. 2. 20:16소식


청소년들의 저항을 제대로 기억하기




여러 갈등이 첨예하게 부딪히는 사회 속에서, 청소년은 그저 ‘나쁜 사회에 물들까 걱정되는 대상’에 머물러 있다. 그러나 주체성 없는 연약한 청소년의 이미지는 청소년이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사회의 의도와 무관하지 않다. 통념과 달리, 사회 문제가 있을 때마다 청소년들은 앞장서 저항해왔다.


2019년 11월 2일,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등 청소년인권단체들은 청소년들의 저항 역사를 기억하고, 그러한 역사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음을 알리기 위해 “이제는 학생 저항의날, 청소년도 시민이다!” 기자회견을 주최했다. 기자회견에서는 역사 속 청소년들이 주장했던 내용을 다시 선언했다.


“나는 1929년 11월 3일 일제의 압제와 식민지 교육을 거부하고, 조선인 학생의 권리를 되찾기 위해 시위에 나선 광주의 청소년이다. 청소년들은 일본인과 조선인 학생을 차별 대우하는 학교에 항의하고 동맹휴학을 했다. 휘문보통고등학교에서는 100명, 경성제1고등보통학교에서는 360명이 동맹휴학을 했고, 함흥, 대구, 평양 등 여러 지역에서 학생들이 동맹휴학에 나섰다. 우리는 조선인 본위 교육과 식민지 차별 교육 철폐를 요구했다. 더욱 자치적인 활동을 위해 교내학우회의 자치제 획득을 주장했다. 하지만 학교는 퇴학과 처벌로만 일관했다.”


“나는 1989년, 전교조 교사 해직에 반대하고 교육민주화를 외치며 행동한 학생이다. 우리는 학생회장 직선제 투쟁을 통해 자주적인 학생회를 만들었고, 그 후 부산, 광주, 마산창원 등의 지역에서 고등학생대표자협의회를 꾸렸으며, 각 학교에서 지역에서 경쟁 교육과 비민주적 학교를 바꾸기 위해 행동에 나섰다. 그러나 우리는 학교로부터는 징계와 위협을 받았고, 경찰에 구속되고 국가보안법으로 탄압당하기도 했다.”

학생운동은 대학생들만의 운동이라고 아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중고등학생들은 분명 시대의 투쟁에 함께 한 이들이었다. ‘안녕들하십니까?’ 대자보 열풍에서도, 박근혜 퇴진 집회에서도 청소년들은 비청소년과 함께 촛불을 들고 대자보를 붙였지만, 사람들은 매번 거리의 청소년들에 대해 낯설고 놀랍다는 반응을 보였다. 이는 전 사회적으로 이루어지는 악의적인 망각이다. 사회는 청소년들의 요구와 행동을 기록하거나 중요한 역사로 기념하지 않는다. 청소년들의 행동이 많은 사람의 기억 속에서 사라질 때, 청소년들은 주체적이지 않고 비자발적이라는 편견이 강화된다.


저항하는 청소년을 기특한 이미지로만 소비하는 현실 속에서 사회는 주체적인 청소년을 요구할 자격이 없다. 표현의 자유, 집회와 결사의 자유는 개인이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품성을 길러야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권리를 눈치 보지 않고 자유롭게 행사할 수 있도록 사회가 얼마나 준비되어 있느냐에 달려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사회가 청소년에게 부당한 폭력에 순응하도록 어떻게 강요해왔는지 돌이켜보아야 한다.


현재까지 이어지는 청소년들의 저항


“2017년 11월 6일, 나는 학교에 대자보를 붙였다. 학생인권조례를 지키지 않는 학교 때문이었다. 학교는 검은 머리와 민낯을 요구하며 개성을 억압했다. 등굣길 계단에는 선도부가 양쪽에 쭉 서 있었다. 자연갈색 머리를 가진 동기들은 자신의 머리카락이 갈색이라는 것을 종종 증명해야 했다.

대자보를 붙인 뒤, 교사들은 나를 불러 오랜 상담을 했다. 모욕적인 말들을 계속해서 들어야 했다. 대자보는 같은 학생들이 찢었다. 학교 사랑을 빌미로 동기들로부터 신체적/언어적 폭력에 시달렸지만, 학교는 나를 보호하지 않았다.” - 양말


일제의 탄압, 권위적인 정권만 학생들을 억압하는 것이 아니다. 양말(활동명)이 대자보를 붙인 이유는 학교의 반인권적인 규칙 때문이었다. 머리카락의 색깔과 입는 옷의 종류를 강요하는 것은 청소년이 부당하게 겪고 있는 표현의 자유 침해다. 그러나 양말의 대자보는 떼어졌고, 양말은 학교 안에서 완전히 ‘찍혀 버렸다.’ 과거의 청소년들이 정치적 행동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징계와 강제 퇴학에 시달렸듯이, 양말 역시 대자보 행동 후 학교를 계속 다니기 힘들 만큼 많은 폭력을 겪었다.


“나는 19살, 고3이었던 2017년 11월 23일에 대학입시거부 선언을 했다. 나는 청소년을 더 효율적으로 값싸게 통제하려고만 하는 학교와, 청소년은 미성숙하니 그런 취급을 받아도 괜찮다고 이야기하는 사회에 저항하고자 했다. 교육에 참여하는 것은 인간이기를 포기한다는 뜻이 아니다. 하지만 청소년들은 아직도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평가당하고 차별당하고 사회로부터 배제당하고 있다.” - 피아


“1년 전인, 2018년 11월 3일, 나는 동료들과 함께 전국 규모의 스쿨미투 집회를 개최했다. 열 명 넘는 고발자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세상에 던지고, 정치적 요구를 만들었다. 우리는 이날, 전국적인 실태조사, 제대로 된 가해자 처벌, 모든 구성원에 대한 페미니즘 교육, 학생 인권법 제정 등의 다양한 요구안을 외쳤다. 청소년들은 피해자를 넘어, 고발자로, 운동가로, 학내 성폭력 문화를 바꾸기 위해 싸웠다.” - 김화현


피아(활동명)가 저항했던 이유는 청소년을 등급으로 나누고 줄 세우는 교육, 낙오자를 만드는 경쟁적 입시 교육 때문이었다. 김화현이 집회를 조직했던 이유는 학내 성폭력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청소년이 처한 현실은 소설이나 드라마 속에서처럼 낭만적이지 않다. 하루하루 부조리함을 맞닥뜨리면서, 참고 넘어갈 때와 달리 분노하고 저항하기도 한다.


과거부터 현재까지, 청소년들은 경쟁적이고, 비민주적이며, 가부장적이고, 인권을 침해하는 학교와 사회에 맞서 저항해왔다. 청소년들은 행동에 나서기 위해 국가보안법과 정권의 탄압뿐 아니라 부모와 교사의 처벌까지 감내해야 했다. 지금의 사회는 청소년들의 이러한 저항이 이루어낸 사회다. 사회는 저항하는 청소년의 존재를 지우지 말라. 우리가 여기에 있어 사회는 변화했다.


- 치이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