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 01 :: 예비 시민 말고 오늘의 시민

2019. 3. 11. 19:47Yosm Special

Special 01

:: 예비 시민 말고 오늘의 시민

 청소년 선거운동 금지에 대한 불복종행동과 청소년참정권 요구 선언 발표



 봄날답지 않게 하늘이 흐렸다. 총선 직전, 게다가 토요일이기 때문인지 기자가 많이 모이지 않았다. 거리의 사람들은 잠시 돌아보다가도 바쁜 길을 갔다. 하지만 모두가 듣지 않아도 서로가 듣고 있으므로, 꾹꾹 눌러왔던 하고 싶던 말들은 또렷하게 이어졌다. 각자가 지지하는 정당을 장미, 나뭇잎 등으로 나타낸 빳빳한 종이장식 머리띠와 공들인 피켓, 입을 막는 선거법을 은유한 흰색 마스크가 화사한 빛을 냈다.


 4/9 (토)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청소년총선대응네트워크(이하 청소년총선대응넷)의 ‘청소년의 선거운동 금지에 대한 불복종행동’ 기자회견이다. 8인의 청소년이 각자 지지하는 정당과 이유를 밝히고, 자신의 정치적 권리를 박탈하는 선거법을 격하게 비판했다. 비청소년인 청소년활동가들과 노동당 비례대표후보 용혜인씨도 자리하며 힘을 보탰다.



“우리는 19금 선거법에 불복종한다”


 불복종을 선언한 사람들은 만 14세에서 18세 사이의 청소년들이다. 본지 기자인 치이즈(장은채)와 본인 밀루(이경은)도 불복종에 참여했다. 이들은 선거권/피선거권이 없을 뿐 아니라, 선거법에 따라 선거운동을 하거나 특정 정당 및 후보를 공개적으로 지지하는 것이 금지되어있다. 정당에 가입하는 것 역시 금지되어있어, 노동당과 녹색당만 청소년당원을 정식으로 인정하고 있다. 2012년 19대 국회의원 선거 때에는 한 청소년이 트위터에 특정 후보를 지지하는 발언을 올렸다가 선거관리위원회의 경고를 받기도 했다. '찍지도 말고 보지도 말고 듣지도 말고 말하지도 말고'라는 청소년운동의 슬로건은 슬프게도 수 년째 유효하다.


 불복종 청소년들의 지지정당은 녹색당, 노동당, 정의당으로 대개 진보정당이었지만, 지지하는 이유와 정도는 각기 다양했다. 정당이 청소년의 정치참여를 지지하는 점, 또는 청소년운동의 요구를 수용한 정책을 펼친다는 점, 그리고 대표적 정책이 사회 전반에 걸쳐 청소년의 삶에도 긍정적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 이유로 꼽혔다. 반대로 청소년의 정치참여를 제대로 보장하고 있지 않아 비판하거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지한다는 목소리도 있었다. 여덟 명의 목소리를 꿰뚫는 하나의 키워드는 기자회견 구호와도 같이, '19금 선거법 개정'이었다.



“선거권을 넘어, 표현할 권리로 이야기해야”


 청소년이 빼앗긴 참정권이라고하면 선거에서의 투표권을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된다. 그러나 이번 불복종행동은 선거운동에 초점을 맞췄다. “참정권 하면 곧 투표권으로 받아들이는데, 한국에서는 청소년의 선거운동이나 정당가입도 금지되어있다. 투표권을 넘어 정치적 표현을 할 권리로 이야기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라며, 십대섹슈얼리티인권모임의 쥬리 씨는 불복종행동의 기획 배경을 설명했다.


 정치인은 국민이 아니라 유권자를 위해 일한다는 말이 있다. 지역 자치와는 상관없는 국회의원 선거 출마자들이 각 지역구를 발전시키겠다는 공약을 앞다투어 내세우는 모습은 이 말을 굳게 뒷받침한다. 지지율을 높여 당선되고 세력을 키우는 것이 각 후보와 정당의 목표인 만큼 자연스럽기도 하다. 하지만 이때 공약과 정책들은 힘이 센 다수집단과 특정 지역의 이익에 초점을 맞추거나 타협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 그런 방식으로는 소수자, 특히 투표권이 없는 ‘무권자’, 청소년들의 권리를 대변하기 힘들다. 어떤 정당은 그럼에도 대변하는 쪽을 택했고, 어떤 정당은 대변하지 않는 쪽을 택했다.



“청소년 당원 탄압에 대해 사과하십시오.”


 노현영(18)씨와 익명 A씨는 각각 청소년정의당의 운영위원과 대표이다. 하지만 당에서는 이들을 예비당원이라 부른다. 청소년 정의당은 정식으로 인정되지 않았다. 노현영씨는 "(예비당원이라는 제도는) 명칭부터 청소년을 동등한 주체가 아닌 '예비'시민으로 취급한다. 정당법에 의해 불가피하게 당권을 부여하지 못한다는 명분이라면, 당내에서 예비당원들의 활동을 최대한 보장해야 하는데 정의당은 부대표 공약에 따라 예비당원 전원동의로 설립한 청소년위원회에 대해 탄압만 가했다"며 통합진보당 청소년당원 전원 제명 사건에 책임이 있으며 정의당 대표인 심상정 후보의 당선을 반대하고 사과를 요구했다.

 A씨는 “(정의당은) 소소한 가치들은 버리고 중요한 가치들을 이루며 대중적으로 힘을 얻으며 원내정당으로 가고 있다. 정의당을 비롯한 정치의 장에서 청소년 참정권과 인권의 문제가 ‘중요한 가치’로 여겨지기를 바라며, 이를 위해 사람들을 설득하고 노력할 것이다”라며 비판적 지지의 입장을 밝혔다.


 반면 노동당과 녹색당은 지지율이 미미한 원외정당이지만, 청소년 당원을 정식 인정하고 청소년참정권을 비롯한 여러 권리를 정책에 반영하며 청소년 불복종자들 중 다수의 지지를 받았다.


 김가을(15)씨와 이경은(18세, 기자 본인)은 청소년운동의 요구가 반영된 학습시간줄이기 정책에 주목했다. 김가을씨는 스스로를 '입시에 찌들어 참정권은 커녕 정치이야기를 할 시간조차 없는 청소년'이라고 밝히며 녹색당의 ‘교육의 녹색화’ 정책이 경쟁과 통제의 한국교육을 변화시킬 것이라는 기대를 말했다. 나는 "야자에 주말, 방학까지 학교에 가둬놓고 공부를 하게 한다는 고등학교는, 도저히 다닐 자신이 없어 학교를 그만뒀다."며 장시간 학습강요 처벌 등 학습시간줄이기 정책을 가지고 있는 노동당과 녹색당을 지지했다. (5면 정책비교 참조)


 대표적 정책이 청소년의 권리에도 도움이 된다며 지지하기도 했다. 활동가 치리(16,아수나로)씨는 “1시간 일해서 좋아하는 라멘집에서 라멘 한그릇 먹지 못한다. 삼각김밥에 컵라면만 먹는 게 아니라, 인간답게 살기 위해 최저임금 1만원이 필요하다”며 노동당을 지지한다고 밝혔다. 송민재(14,청소년녹색당)씨는 청소년이 가정에서 폭력을 당하면서도 경제적 권력이 없어 가정에 얽매일 수밖에 없는 현실을 지적하며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다. "기본소득은 청소년의 경제적 자립 또한 가능하게 할 것이다. 친권자가 청소년을 통제하는 방법 중 하나가 바로 '용돈 깎는다', '집에서 쫓아낸다'인데, 이런 식의 협박이 더 이상 통하지 않을 것이다. 기울어진 가정 내의 권력구도를 수평적으로 돌려놓을 수 있을 것이다."



청소년의 권리가 보장되려면

청소년의 목소리가 국회에 울려야


 서온(16,청소년녹색당)씨는 선거연령하한 헌법소원의 각하 근거를 비판했다. "(청소년들이 부모와 보호자에게만 의존해 독자적인 결정을 내리기 힘들 것이라는 말은) 과거에 여성의 참정권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이들의 명분과 같다. 그들은 여성들이 남편을 따라 투표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이 타당하지 않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장은채(18,본지 기자)씨는 청소년 참정권을 지지하는 노동당, 녹색당을 지지한다며, 청소년의 참정권 박탈로 인한 악순환을 지적했다. “청소년들은 정치를 참여할 수 없기 때문에 국회에 청소년들의 요구는 들어갈 틈바구니가 없다.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이 없는 반인권적인 학칙, 줄어들기는커녕 점점 늘어나는 사교육과 학습 시간은 그 때문이기도 하다. 청소년이 선거를 할 수 없고, 선거운동을 할 수 없고, 그래서 청소년을 대표하는 국회의원이 단 한 명도 없기 때문에, 청소년들의 삶의 질은 더 하락하고 있다. 청소년은 '예비 시민'이 아니라 동시대를 같이 살아가고 있는 지금의 시민이다.”


 청소년들의 지지이유를 직접 증명하듯, 노동당 비례대표후보인 용혜인씨는 이번 행동을 지지했다. “용혜인 선본은 불법을 저지르고 있다. (청소년당원이) 피켓들고 명함 뿌리는 것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기획하고 토론하고 회의하고 노동당의 메세지를 만들고, 집행하는 일을 함께 하고 있다. 모든 사회구성원이 참여하는 것이 민주주의의 기본이다"라며, 앞으로도 계속 청소년참정권 문제를 타협하지 않고 주장할 것임을 밝혔다.


 이틀 후인 4/11(월), 청소년 257인을 비롯한 1242명의 개인이 연명한 <평등한 민주주의의 봄을 바라는 청소년 참정권 요구선언>이 발표되었다. 녹색당 비례대표후보 이계삼씨는 “녹색당은 청소년참정권을 핵심 공약으로 삼고 있다. 청소년을 가르치려고 들지 말아야 한다”고 발언했다. 사회를 맡은 공현(아수나로)씨는 "흔히 정치가 너무 어렵고 더럽고 힘든 거라고들 말하던데, 불쌍한 우리 어른들만 그런 고생하지 말고 청소년도 함께하자고 하는 것. 같이 짊어지는 동료 시민으로 보자."라며, 훗날 정치에 제대로 참여하기 위해 배우는 과정으로서 청소년에게 참정권이 필요하다는 주장의 부족함을 짚었다.


 혹자는 기다리면 주어지는 권리라고 한다. 하지만 만 19세라는 선을 긋고 성숙을 판별해 권리를 박탈하거나 보장하는 사회에서, 열아홉 살의 나는 열여덟 살의 나를 대변할 수 없다. 4월 9일과 11일 두 날의 광화문에는, 만 열아홉 살의 봄이 아닌 지금의 나에게 주어질 봄을 바라는 사람들이 있었다. 아마 그 봄은 아직 멀었지만, 기다림은 손에 손을 건너 이어질 것이다.



-밀루 기자



 


취재 뒷 이야기


믿음직한 우리 당

4.13 총선 전날, 이 불복종 행동에 관해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던 중 심각한 물음이 튀어나왔다. ‘만약 노동당 비례대표 후보가 당선이 되었는데, 청소년이 당원 가입하고 선거운동에 참여하는 등 불법을 저질렀다고 해서 당선이 취소되면 어떡하느냐’라는. 그러자 청소년이자 노동당 지지자인 친구가 이렇게 말했다. “당선이 될 정도라면 당의 세력이 지금보다 훨씬 커진 후일 테고, 당선이 무효가 되면 이슈화도 될 거야. 그렇다면 그 법을 바꿀 힘도 있을 거야. 우리 당이 그런 이유로(청소년 참정권 관련) 입장을 무를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아.” 나를 비롯한 다른 친구들은 무릎을 탁 쳤다.


과거의 시민이 아닌 오늘의 시민

아빠가 내 권유를 따라 정당투표를 했다고 말했다. 아마도 내가 선동적이고 단순한 말로 피력한 기본소득 공약이 마음을 움직였던 것 같다. 선거 공보물을 처음 받았을 때만 해도, 그는 같은 빨간색이라는 이유로 해당 당과 새누리당을 헷갈려 했었다. 하지만 나는 그렇다고 해서 그의 혹은 50대 국민의 성숙도나 시민의식, 정치적 관심도 따위를 평가할 생각은 없다. 우리는 그저 서로 설득하고 영향을 주고받으며 살아갈 뿐이다. 마지막으로, 이번만큼은 내 의견을 자신 또래의 의견 못지않게 깊이 고려해 준 아빠에게 기쁨의 칭찬을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