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를 위한 탈―가족

2017. 7. 4. 18:36칼럼-청소년의 눈으로


존재를 위한 탈―가족


 지난 6월 21일, 서울시 청년수당 선정자가 발표되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지원자격 미달’이라는 요건으로 심사에서 탈락했다. 서울시 청년수당은 서울에 사는 만 19~29세의 미취업 청년에게 최소 2개월에서 최대 6개월간 매월 50만 원의 수당을 지급하여 (취업을) 준비할 ‘시간’을 주겠다는 취지의 사업이다. 오랜 기간 미취업 상태로 노동법의 사각에서 비정기적인 소득만을 얻어 살아온 나는 이것이 나를 위한 사업이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공고에 따르면 기준 중위소득 150% 이상 가구 청년은 신청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가정에서 납부하는 건강보험료를 기준으로 그 금액이 얼마 이상이면 신청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나의 경우 부친의 피부양자로서 건강보험에 가입되어 있어 내가 직접 내는 보험료는 한 푼도 없었지만, 부친의 보험료는 해당 기준을 넘었다. 나는 부모에게서 물리적으로 독립하여 별개의 세대주로서 다른 집에 살고 있고, 부모에게 정기적으로 용돈을 받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기준은 내게 ‘가족’ 단위의 재산을 기준으로 하여 수당을 줄지 말지를 결정하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게 부모 돈이지 내 돈이냐고 호소할 창구는 없었다.



가족이라는 굴레


 이때 내 머릿속을 스친 것은 송파에서 죽어간 세 모녀였다. 한국사회에서 ‘부양의무’라는 것은 윤리 정도로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국민기초생활 보장법’이라는 법 조항에 글자로 새겨져 가족과 빈곤의 굴레로 작동하고 있다. 그 속에서 강제되는 부양의무는 사람들이 가족이라는 공동체로 묶일 것인지 선택할 권리를 기본적으로 배제하고 있으며, 부와 복지의 영역에서 사람들을 개별 주체로 인지하기를 거부한다. 부양의무제 조항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현 국민기초생활 보장법에는 부양의무자[각주:1]가 존재하는지 여부와 그의 부양능력을 바탕으로 복지 대상을  선별하여 지원 기준에 ‘미달’되는 사람을 골라내겠다는 강력한 의지가 담겨있다. 하지만 그 ‘가족 단위’라는 것이 현실에서는 너무도 구멍이 많은지라 커다란 복지의 사각지대가 생겨난다. 이때 복지를 누리기 위해 누군가는 가족에게서 벗어나고 싶어도 벗어나지 못하게 되기도 하고, 누군가는 너무나도 가족과 함께하고 싶지만 서로 연을 끊도록 내몰리거나 끝내 죽음을 선택하기도 한다.


 국가가 떠넘긴 복지의 책임을 원활히 수행하기 위해 가족은 나이에 따라 보편적인 생애주기를 따르도록 구성원 서로를 압박하게 된다. 대부분의 복지정책이 그를 기반으로 마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10대에 가정을 꾸리거나 독립하려면 수난을 겪지만, 20~30대 ‘신혼부부’를 위한 정책은 국가가 떠먹여주는 식으로 말이다. 누군가가 보편적인 생애주기에 어긋나는 삶을 살아가게 되었을 때 필요하지만 보장되지 않는 복지는 대부분 고스란히 가족의 부담으로 남게 된다. 그나마 운 좋게 가족 안에서 해결이 가능하면 다행이지, 가족이 감당할 수 없거나 같이 부담을 나눌 수 있는 가족이 없으면 소위 ‘인생 망했다’ 소리를 듣게 된다. 최저임금은 1만 원을 넘지도 않는데 노동시간이 길기로는 OECD 국가 중 1, 2위를 다투는 한국에서 이 부담이 오롯이 가족의 몫으로 남는 것은 가혹한 일이다. 그래서 가족은 구성원들의 삶을 서로 철저히 단속한다. 가족은 청소년 자식으로 하여금 앞으로 잘 벌어서 복지의 책임을 나눌 수 있는, 요컨대 훗날 늙은 부모를 어느 정도 부양할 수 있는 ‘경제인구’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것을 위해서 청소년기에 요구되는 것이 바로 공부이다. 이러한 인식을 뒷받침하는 다양한 법제도 역시 작동하는데, 청소년의 권리를 친권자의 허락과 인증을 통해야만 누릴 수 있도록 하는 나이제한 조항들이 그것이라 하겠다. 그 일종으로 청소년의 나이에 따라 노동을 막거나 노동을 하는 데 부모의 동의를 요구하는 노동법을 떠올려 볼 수 있다. 대부분의 청소년 노동자에게 주어지는 열악한 노동조건 및 노동환경도 ‘청소년기=공부’라는 공식의 보편적인 생애주기를 강화하는 데 일조한다.


 나는 공부에 매진하며 부모에게 경제적인 모든 것을 의존하던 청소년기를 거치며 그들의 돈을 허투루 쓰는 것에 대한 죄책감을 갖도록 길들여졌다. 부모의 돈으로 사치를 하는 것은 죄악이라는 감각을 내면화했다. 부모가 늙어서 노동을 할 수 없게 되었을 때 경제인구가 된 나에게 돈을 타 쓰면서 부채감을 느끼게 되면 서로 공평해지는 것일까? 결코 아니다. 이는 그저 구성원의 생애주기에 따라 죄책감과 부채감을 순환시키며 가족이라는 불평등한 공동체가 유지되는 양상에 불과하다.


 부모는 청소년 자식이었던 나의 경제적 권리를 비롯한 대부분의 권리를 쥐락펴락할 수 있는 압제자였다. 그러나 동시에 경제적인 모든 것을 무상으로 받았다는 데서 오는 부채감은 나로 하여금 그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갖게 했다. 나를 먹여 살리기 위해 한평생 일만 해 온 (것처럼 보이는) 그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까지도 갖게 했다. 압제자에 대한 이 아이러니한 감정은 부양의무를 들먹이는 복지제도와 더불어 나를 부모와 원가정에 끝없이 얽매여 있도록 만든다. 


 중위소득 150% 이상에 달한다는 그 부는 내가 아니라 부친에게 속해 있다. 내가 그 돈을 얻기 위해서는 나보다 가정 내에서 훨씬 권력이 많은 부친과 협상을 해야 한다. 결코 평등한 주체끼리의 협상이 아닌 그 과정은 대개 내게 불리하다. 그 시간은 나의 주체성을 잠시 뒷전으로 하고 부모가 사랑하는 모습만을 담은 ‘딸의 가면’을 쓰는 비굴한 시간이기도 하다. 국가는 이런 불평등하고 폭력적이기까지 한 부의 분배 과정을 개별 가족 구성원에게 맡겨둔 채 편하게 가족 단위의 부를 세어 복지대상을 선별한다. 게으르기 짝이 없다. 국가는 가족이 불평등한 공동체이며 그 구성원이 누군가에게 ‘종속될 수 없는’ 권리를 가진 개별 주체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적극적으로 외면함으로써 복지비용과 책임의 절감이라는 부당한 이득을 취하고 있다.



가족을 넘어 개별 주체로


 사람은 누구나 의존을 한다. 의존은 사람들의 관계를 구성하는 자연스러운 요소 중 하나이다. 그러나 생산성을 가져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의존은 쉽게 죄책감이나 부채감과 연결된다. 의존하는 만큼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런 인식 때문인지 의존과 종속은 쉽게 혼동되는 듯하다. 의존하는 사람들을 누군가에게 ‘딸린 존재’로 여기면서 그들의 권리를 무시하는 걸 보면 말이다. 그러나 그 누구도 함부로 다른 사람에게 ‘딸린 존재’로 여겨질 수 없다. 한 사람의 의사는 누군가의 결정에 딸려가는 부속품이 아니라 시시각각 변하는, 살아있는, 그 자신의 것이다. 가족 안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지금과 같이 국가가 복지의 책임을 가정에 떠맡기는 방식으로는 존재들이 평등하고 안전하게 의존하기 어렵다. 죄책감이나 부채감 없이 의존할 권리를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사회를 바란다. 그때 우리는 보다 인간답게, 각자가 가진 욕구를 솔직하게 드러낼 수 있지 않을까.


- 호야 기자




  1. 수급권자를 부양할 책임이 있는 사람으로서 수급권자의 1촌의 직계혈족 및 그 배우자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