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의 이름으로 체벌을 거부한다는 것(1) 여교사들이여, 학교를 여성주의 해방구로 만들자!

2017. 2. 16. 17:49칼럼-청소년의 눈으로

110대, 자살, 미친년, 여교사


‘아무리 말을 해도 듣지 않는다. 이유도 설명하지 않고 자율학습에 자꾸 빠지는 A에게 좋은 말로 훈계한 것도 석 달째다. 무시하듯 내 말을 넘기는 A를 보면 화가 솟구치지만, 매는 들고 싶지 않아 끝끝내 참아왔다. 어제는 빤히 내가 보고 있는데도 가방을 싼 후 교실 문을 나서려 했다.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더 이상 내 마음을 스스로 조절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옆 반 담임선생님의 매를 빌려 발바닥을 때리기 시작했다. 한 대, 두 대, 정신없이 숫자가 올라갔지만 내 손에는 어떤 감각도 없었다. 정신을 차리고 A를 봤을 때, A는 거친 숨소리를 내며 울고 있었다.’

지난 5월 1일 광주의 한 고등학교 남학생이 자살을 했다. 선생에게 발바닥을 110대 맞은 다음 날이었다고 한다. 체벌 사유는 자율학습 불참이었다. 110이라는 숫자도 그렇고, 체벌 사유도 그렇고 소설 같은 이야기다. 그렇지만 소설이 아니다. 무심코 기사의 댓글들을 읽어보니 중간 중간에 ‘미친년’이라는 단어가 눈에 띈다. 체벌교사는 여성이었고, 교직 경력 5년으로 갓 기간제 교사 딱지를 뗀 20대 ‘여교사’였다. 교장의 딸이라는 정보도 함께 쓰여 있었다. 

사건의 자세한 맥락을 아는 것도 아니고, 맥락을 안다고 해서 체벌한 여교사를 옹호할 생각은 전혀 없다. 다만, 나 또한 ‘기간제 여교사’라는 교사 중에서는 최하위 계급으로 일해 본 경험이 있고, 여전히 그 최하위 계급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는 주변 친구들이 있기 때문에 여교사가 남학생(혹은 여학생)에게 매를 들게 되는 경위는 대략 추측할 수 있다. 특수한 맥락들은 삭제한 상태에서,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여교사의 마음의 지도를 그려보면 위와 같지 않을까. 여교사는 아무리해도 ‘남교사’에 비해 학생들 앞에서 권위가 서지 않는다. 마음속으로 ‘체벌은 아니다’라는 주문을 외워도 결국엔 ‘매를 부른 것은 너희들이다’는 자기 합리화의 과정을 거쳐 없는 매를 빌려서라도 때리게 되는 상황에 놓인다. 

남학생의 여성화? 여교사의 남성화?

서울지역 초등학교의 여교사 임용 비율이 90%를 넘어섰다고 한다. 자녀가 평판 좋은 남교사를 담임으로 만나려면 3대가 공덕을 쌓아야 한다는 농담이 학부모들 사이에 나돌 정도란다. 조선․중앙․동아일보를 비롯한 보수언론은 ‘남학생들의 여성화’가 우려된다며 호들갑 떠는 사설을 종종 끄적거린다. 여교사가 남학생들의 교내 폭력을 막는 데 큰 한계가 있으며, 학생들의 성역할모델이 한쪽으로 치우쳐 문제가 된다는 거다. 

개인적으로 나는 남학생들의 여성화를 매우 환영하는 입장이다. 지금까지 학교든 사회든 공동체 내의 모든 기준이 남성으로 치우쳐 설정되어 있지 않았었나. 학교가 여성화된다는 건, 가히 혁명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다. 현존하는 마초들은 여전히 골칫거리로 남겠지만, 적어도 ‘어린 마초’들의 재생산은 상당부분 중단될 게 아닌가. 여성화된 학교를 졸업한 남학생들의 군대 내 부적응은 심각한 사회 문제로 떠오를 테고, 편향적인 성역할모델을 강요하는 군대에 대한 병역거부 선언이 줄줄이 이어질 것이다. 얼마나 즐거운 상상인가. 

그러나 보수 언론의 현실 진단은 언제나 그렇듯 오판이다. 안타깝게도 학교는 여성화되지 않았고, 그럴 기미도 아직은 보이지 않는다. 생물학적으로 여성인 여교사의 숫자가 늘어났다고 해서 자연스럽게 학교가 여성화 되는 것은 아니다. 남교사의 숫자가 줄면서 학교 안에서의 군대식 훈육이 덜 용이해진 측면은 있다. 그러나 남성 중심적 가치 규범을 전수하는 교육과정이 그대로이고, 가부장제화된 학교 구조가 그대로인 한 그동안 남교사가 맡아 왔던 역할을 여교사가 맡게 된 것일 뿐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다. 학교에서 대개 가장 엄한 여교사가 학생부장 또는 학년부장을 맡는다. 이는 가족 내 규율을 다스리는 엄격한 아버지의 상징이다. 예전에는 학생들을 어머니처럼 세세하게 보살피는 것이 여교사들의 역할이었다면, 이제는 아버지의 역할을 얼마나 잘 수행하느냐에 따라 평판이 엇갈린다. 애들 좀 엄하게 대하시라, 필요하면 좀 때리고 기합도 주라는 교장 또는 학부모들의 부탁이 여교사들에게 쏟아진다. 



위 사진:영화 속에서 재현되는 여교사 모습의 변화 (좌: 1966년 영화 ‘민검사와 여선생’/ 우: 2002년 영화 ‘몽정기')


어찌됐든 교장이나 학부모들의 요구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린다 치더라도, 여교사들을 가장 시험에 들게 하는 것은 학생들, 특히 남학생들의 태도다. 남교사들 말에는 (그 말에 동의하는지 여부와는 별개로)깨갱하는 학생들이 자신의 말은 무시하거나, 싸가지 없는 반응을 보일 때 체벌을 하고 싶은 욕구가 불끈 든다는 한 여교사의 고백은 솔직하다. 교사와 학생 사이의 권력 관계만을 고려하면, 교사가 우위에 있다고 말할 수 있지만 남학생과 여교사 사이에서는 성별 권력 또한 작동한다. 영화 ‘몽정기’ 에서처럼 남학생들은 여교사를 교사 이전에 ‘여자’로 보고 쉽게 대상화한다. 여교사들은 이 권력 차이를 뒤집기 위해 자신이 가진 교사로서의 권력을 활용한다. 남교사와 같은 지위를 누리고픈 여교사들의 일차적 선택은 체벌로 이어진다. 
 
예고된 실패 ‘남교사 모방하기 프로젝트’

그러나 여교사가 아닌 교사가 되고 싶은 수많은 여성들의 ‘남교사 모방하기’ 프로젝트는 실패를 예고할 수밖에 없다. 모범적인 교사의 기준이 남성인 한, 그리고 여교사가 남성이 될 수 없는 한 그녀들은 언제나 뭔가 부족하고 불완전한 존재로 머물게 된다. 남교사의 지도에는 응하지만 여교사의 지도에는 불응하는 학생들...... 이건 내가 여성이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가 아니라, 학교의 규율과 훈육방식이 남성적으로 구성되어 있고, 그들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설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아도 반성문을 써야 집에 갈 수 있고, 학생들의 사적인 물건을 영장 없이 압수할 수 있으며, 시도 때도 없이 소지품 검사를 할 수 있는 곳이 학교 아닌가. 365일 공안 정국을 연상케 하는 학교를 유지시키는 것은 군대식 소통이다. 일방적인 명령과 훈계의 언어가 학교를 가득 채운다. 

학교 상황이 이러한 만큼 군대를 다녀온 남성, 누군가를 지배하고 명령하는 역할에 익숙한 남성들이 교사 역할을 더 ‘성공적’으로 수행한다. 이미 남성에게 유리한 기준으로 설정된 학교에서 여교사들이 아무리 체벌을 택하고, 남교사와 같은 지도를 모방한다해도 남교사와 같은 대접을 받을 수는 없다. 혹시나 이런 지도 방식에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여 일부 여교사들이 ‘성공한’ 교사의 대열에 편입된다해도, ‘실패한’ 수많은 여교사들은 성공한 여교사들과 비교 당해 더 큰 압박을 받을 것이다. 여교사들 사이에서 갈등과 분리는 더욱 커지고, 문제는 남성이 기준인 학교임에도 서로를 미워하고 끊임없이 그 내부에 위계를 만들어낸다. 여교사뿐만 아니라 남성적인 가치를 체화하지 못한 남교사 또한 자신에게 부여되는 임무와 실제 자신이 원하는 역할 사이에서 외압을 경험할 수밖에 없다. 

여성-청소년, 소수성의 연결

또 하나 더 큰 함정은 여교사들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교사로서의 권력을 성찰하지 않고 동등한 교사로서의 지위만을 요구할 경우, 학교 안의 또 다른 약자인 학생들의 인권에 대해서는 침묵하게 된다는 것이다. ‘나이도 어린 것들이 남교사들이 뭐라고 할 때는 쫄면서 왜 나에게는 쫄지 않는지’는 위에서 언급한 바처럼 젠더적 분석이 가능한 문제다. 그렇다고 그 문제의 방점이 ‘남교사와 마찬가지로 내 말에도 학생들이 쫄아야 한다.’ 가 되면 곤란하다. 학생이 교사에게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거나 교사 앞에서 자신의 의지대로 행동하면 그것은 왜 곧 대드는 것이 되고 싸가지 없는 행동으로 읽히는 걸까. 청소년은 보통 미숙하고, 여리며, 아직 경험이 부족해 온전한 판단을 내릴 수 없는 존재로 이미지화 된다. 그렇기 때문에 보호가 필요하고, 지도가 필요하다는 사회적 당위와 연결되며, 학교 안에서 수많은 인권 침해 행위도 방조되며 옹호된다. 곰곰이 살펴보면 이는 사회 속에서 재현되는 여성의 이미지와 많은 부분 유사하다. 여성은 약하며, 여린 존재기 때문에 남성들과 동등하지 않으며, 남성들의 보호가 필요하다는 논리는 사회 곳곳에서 교묘하게 또는 노골적으로 실현되어 왔다. 여성성이 태어날 때부터 고정되어 있는 특성이 아닌 사회적으로 구성되고, 만들어진 개념인 것처럼 사회에서 당연시되는 ‘청소년/학생’에 대한 이미지도 의도를 가진 구성이었다는 점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학교의 군대식 규율 문화 아래서 여성과 청소년의 소수성은 마주친다. 미성숙한 학생들은 학교가 바라는 인간상이 될 때까지 인간이길 포기해야 하며, 불완전한 여교사들은 교사로 인정받기 위해 남교사의 역할을 대신하길, 여성성을 극복하길 강요받는다. 

문제의식의 이동해야 해법 찾을 수 있어

학교가 학생들에게 가하는 체벌 등의 폭력은 그 자체로도 문제지만, 그러한 폭력을 사용하면서까지 가르치려 하는 내용이 뭔가에 대해서도 성찰해야 한다. ‘야자를 꼭 시켜야 하는데, 내 말을 듣지 않는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서 ‘왜 야자를 모두에게 강제해야 하는가, 왜 이런 문제 때문에 학생들과 내가 갈등을 겪어야 하는가’로 문제의식이 이동해야 다른 식의 해법을 고민할 수 있다. 그래야만 그린마일리지(학생들의 상벌점을 전산화하는 시스템, 체벌의 대안으로 논의됨)같은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제도에 대해서도 명확히 거부 의사를 표할 수 있다. 

학교를 여성주의 해방구로!

요즘 학교가 어수선하다고 한다. 학생들이 예전처럼 순하지 않다고 한다. 스승과 제자의 애틋함이 살아있는 옛날의 학교가 그립다고 말한다. 사회는 학교가 흔들리는 이유를 남교사의 부재에서 찾고, 그 빈틈을 메우기 위해 여교사들을 동원한다. 군 생활을 추억하는 남자들에게 그럼 다시 군대에 다녀오고 싶냐 물으면 백이면 백 아니라고 한다. 그곳이 얼마나 권력이 없는 사람에게 불합리하고, 억울한 공간인지 알기 때문이다. 학교도 마찬가지다. 대통령도 놀려먹는 시대에 선생의 한마디가 법으로 군림하는 학교는 한참 이상하다. 학교의 어수선함은 학생들의 타락 때문이 아니라 그것의 모순이 터져 나오는 현상에 다름 아니다. 

역발상을 해보자. 이 어수선함을 기존의 억압적인 관계를 바꿔내는 계기로 삼을 수 있지 않을까. 남교사가 사라진 학교에서, 여성들이 대다수를 차지하는 이 흔치 않은 공간에서 여성주의적인 관계맺음을 시도해 보는 것은 어떨까. 수평적이고 평등한, 불필요한 규율을 강제하지 않는, 젠더 권력의 문제와 나이 권력의 문제를 동시에 해결할 수 있는 멋진 실험들을 학교 안에서 시작한다면, 학교가 여성주의 해방구가 된다면, 얼마나 통쾌할까. ‘여성’의 이름으로 매를 들지 않는 것은 곧 남성들이 만든 규칙과 세계를 거부함을 의미한다. 체벌에 반대함으로써, 무너져야 마땅한 학교 권력을 무력화시킴으로써 학생 인권과 여성주의는 이렇게 만난다. 


한낱

인권교육센터 들



* 2009년 인권오름 154호 '페미니즘인(in)걸' 꼭지에 실렸던 글을 다시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