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시는 나에게 □다

2019. 1. 23. 15:13극한직업청소년

입시는 나에게



나에게 입시란?

자퇴생인 나, 열아홉의 나에게 입시와 경쟁은 무엇인가?

질문을 던지기 전에 오늘 아침에 본 뉴스를 먼저 언급해본다. 으레 그래왔듯, 수능 날이 가까워지면 줄줄이 나오는 기사 중의 일부다.


‘수능 10일 전, 기도를 하고 있는 어머니……,’


기사 속 ‘어머니’라고 표현된 한 사람의 모습은, 퍽 간절하고 애절해 보인다. 이 무렵에 나오는 이런 기사들에 나는 씁쓸하기 그지없었던 차였다.


그때, 기사의 베댓(베스트 댓글, 추천 수가 많아 맨 위에 보이는 댓글)에는 놀라우리만치 나의 마음과 일치하는 말이 적혀있었다.



‘내 자식만 잘되게 해달라고 비는 기도는 옳지 않다. 남들을 밟고 올라서서 성공하게 된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발밑의 사람들을 업신여기고, 물건으로 볼 수밖에 없다. 우리는 함께 잘 살아가는 사회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 라는 내용이었다.


그렇다. 나에게 입시 전쟁터란, 다르게 말해 학교 안은, 그야말로 ‘계급사회’였다. 청소년 시절이 이미 많이 지나버린 어른들은 “학교만큼 계급이 없는 곳은 없다. 사회로 나가보면 그야말로 갑을(甲乙)관계의 연속이다.”라고 늘어놓지만, 적어도 나에게 학교란 그렇게 평등한 작은 사회가 아니었다. 늘 보이지 않는 ‘성적 계급’, ‘대학 계급’에 따라 선생님들의 태도, 나아가면 친구들의 눈길마저 달랐다.


평균 1~2등급, 그야말로 상위권 학생들에게만 주어지는 ‘특혜’를 무시할 수 없었다. 대표적인 특혜로는 기숙사를 성적순으로 잘라서 쓰게 하고, 자습실을 따로 주고, 우등반 아이들이 제일 먼저 급식을 먹게 해주는 시스템이다. 그야말로 갑을관계보다 더한 엄연한 ‘차별’이다. 더한 학교들도 많을 것이다. 반대로 7~9등급의 학생들에게 날아오는 ‘동정과 연민’의 시선도 친구들을 주눅 들게 했다. 학교에 가면 여러 선생의 한숨을 듣고, 집에 가면 부모의 한숨을 들었다.


그 차별에서 윗 계급으로 올라서기 위한 친구들의 발악은 처절했다. 1점 차로 등급이 나뉘는 날에는 성적표를 들고 엉엉 울기도 했고, 모의고사에서 점수를 못 받으면 한강다리로 죽으러 갈 사람들을 모집한다는 농담을 던지는 일이 파다했고, 시험 전날에 잠을 깨려 하도 볼펜으로 허벅지를 찔러 퍼렇게 멍이 들어 학교에 오기도 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 나는 ‘누군가 한국 고등학생들을 몰살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대학을 만든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그야말로 죽고, 죽이고, 올라서려 발악하는 ‘전쟁터’였다. 휴전상태인 대한민국에서도 늘 끊임없이 전쟁은 일어나고 있었다. 누구보다 처절하고 공격적인 무기를 가진 사람들의 전쟁. 그 무기는 ‘앞으로의 삶에 대한 책임’이란 무게였고, 한 명을 밟아 죽일 때마다 한 단계 위로 올라가는 그야말로 ‘상대적인 평가’였다.


사회 안에서 사람들은 요즘 고등학생들을 보고 ‘입시 괴물’ 이니, ‘입시 교육의 폐해’니 하며 인성교육을 강조해야 한다고 혀를 차고 있다. 아이들이 점점 치열해지고 잔인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말을 들으면 일단 기가 찬다. 왜 그 탓을 학생들에게 돌리는지. 우리는 ‘가만히 있어야’하고 ‘좋은 직업을 가지기 위해 친구를 밟고 올라서’라고 배웠다. 우리의 힘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은 가만히 복종하고 좋은 성적을 유지하는 것밖에 달리 없었다. 그걸 가르친 교사들과 잔인한 입시 교육 정책을 만든 이들이 ‘입시 괴물’이고 ‘폐해’지, 그들의 희생양인 학생들에게 모조리 덮어씌우는 꼴이란.


 

현재 자퇴생인 나도 ‘대학은 어디 갈 거니?’ ‘좋은 대학 가려고 자퇴한 거 아냐?’ 하고 질문하는 사람들이 많다. 입시교육에서 벗어나려 자퇴를 해도 어느 곳에서나 입시 이야기가 들려오고, 그런 말들은 나에게 부담감과 압박감을 안겨준다. 한국을 벗어나지 않으면 입시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만 같은 악몽이다. 난 이 악몽 속에 살고 있다.


- 주봄